[詩가 있는 아침] 노들강변에서

김춘성 시인 | 기사입력 2022/03/23 [09:30]

[詩가 있는 아침] 노들강변에서

김춘성 시인 | 입력 : 2022/03/23 [09:30]
 
/노들강변에서
 
큰 아버지는 큰 키로 적국의 복판에서 큰일을 도모하다 조국으로
 
끌려왔다
 
다른 청춘들이 끌려간 자리로 돌아온 그는 수양버들이 되어 가만히 서있어도
 
출렁거렸다
 
강한 술기운이 큰 아버지의 평형수가 되어 간신히 중심을 
 
잡아 주었다
 
그러다, 어쩌다, 볕이 드는 날에나 겨우 입을 열어 노들강변의 봄버들, 을
 
노래했다
 
하늘 쪽으로 눈을 길게 흩트리고 이따금 한 팔을 꺾어가며 기묘한 목청으로 오랜만에
 
웃기도 했다
 
그런 날 큰 아버지는 더욱 우뚝한 줏대로 엄숙하고 청명하고
 
맑았다
 
더 기가 막히도록 뒷머리를 얻어맞은 큰 아버지는
 
더욱 더 노들강변을 불렀다
 
노들강변을 빼고 그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문수산 가슴에 벼를 심으려 산의 심장을
 
파헤쳤다
 
깊은 가뭄에 산의 핏물이 말랐어도 큰 아버지는 산을
 
믿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심장을 열어 평형수를 꺼내어 물기를
 
나누었다
 
입은 더욱 더 굳게 잠그고 마음은 더욱 더 열어 아무도 그 속을
 
몰랐다
 
 
그렇게 수 십 년을 자신을 퍼 올리다가 마침내 샘의 바닥이 드러나자 그는 조용히, 아무도 몰래
 
기진을 하였는데,
 
돌이켜 보면 그의 몸에서 평형수가 사라져 줄어들 때마다 그는 더욱 균형을 잡아갔던
 
것 이었는데,
 
지금도 노들강변 근처에 오면 비바람 속에서 빛을 볕을 끌어오는 큰 아버지의 억센 팔뚝이
 
보이는 것이다.
 
끝내 부러지지 않고 끝끝내 구부리던 굴복을 마침내 삭혀내던 장엄한 통음의 독송讀誦이
 
들리는 것이다.
 
휘휘 늘어진 가지마다.
 
-김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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