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실천한 수원의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을 기억하다

-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애국계몽운동가로 조국 위해 평생 바쳐
- 1874년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출생,수원에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한 유일한 인물
- 삼일여학교·삼일남학교 설립에 중추

신지현 기자 | 기사입력 2024/02/27 [10:56]

‘노블레스 오블리주’실천한 수원의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을 기억하다

-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애국계몽운동가로 조국 위해 평생 바쳐
- 1874년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출생,수원에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한 유일한 인물
- 삼일여학교·삼일남학교 설립에 중추

신지현 기자 | 입력 : 2024/02/27 [10:56]

▲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 세워진 필동 임면수 선생 동상 앞에서 이재준 시장이 묵념하고 있다./수원특례시 제공  © 모닝투데이


[모닝투데이=신지현 기자]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는 한 독립운동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필동(必東임면수(林冕洙, 1874~1930) 선생이다동상 옆에 임면수 선생의 삶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근대 수원을 대표하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대한제국기 삼일학교를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수원지역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부민단 결사대로 독립항쟁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임면수 선생은 독립군을 양성한 독립운동가이자 수원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한 애국계몽운동가였다또 인재 양성을 위해 수원에 삼일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였다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임면수 선생의 삶을 소개한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임면수는 1874년 6월 10일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현 북수동)에서 태어났다북수동 팔부자 거리의 한 집이었을 정도로 부유한 가정이었다. 1892년 전현석(1871~1932) 여사와 결혼했다임면수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할 때 전현석 여사는 다친 독립군을 치료해 주고그들의 식사를 하루에 몇 번씩 준비하는 등 헌신적인 내조로 남편을 지원했다.

 

1905년 4월 수원화성학교를 졸업하고상동청년학원에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1907년 대구에서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 진 빚을 백성들이 나서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임면수는 김제구이하영 등과 함께 수원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작성해 수원뿐 아니라 경기도 각 군에 배포해 의연금을 모았다.

 

▲ 1921년 임면수 선생 체포당시 사진(앞줄 오른쪽)/수원특례시 제공  © 모닝투데이


일찍이 근대 사상을 깨치고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임면수는 나중석, 이하영 등 수원지역 유지들과 힘을 합쳐 삼일남학교와 삼일여학교를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09년에는 삼일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사립학교 설치 운동을 주도했고삼일여학교 건물을 지을 때는 토지를 희사했다삼일학교는 1909년 고등과 제1회 졸업생 20명을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는 1910년 제1회 졸업생 4명을 배출했다.

 

1910년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12년 만주 서간도 환인현 횡도천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섰다임면수는 수원에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만주 지역 상황이 열악해지자 신흥무관학교 유지비와 군사 훈련비를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12년 임면수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한인자치기구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했고임면수는 부민단 결사대로 활동했다.

 

1910년대 중반에는 만주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양성중학교는 학생들에게 한글한국사한국지리 등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간도 출병을 하자 해룡현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임면수는 일본군 토벌대에 체포돼 중국에서 추방됐다. 1921년 길림 시내에 잠입해 활동하던 중 밀정의 고발로 체포됐고평양감옥에 압송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반신불수가 돼 고향 수원으로 돌아왔지만거처할 방조차 없었다.

 

몸은 망가졌지만교육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건강이 다소 회복돼 거동할 수 있게 되자 1923년 건립된 아담스기념관 건축 공사감독을 맡았다현재 삼일중학교 교정 안에 있는 아담스기념관은 미국 아담스교회의 도움을 받아 지은 것이다임면수는 그토록 꿈꿨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0년 11월 29일 순국했다. 56세 되던 해였다.

 

▲ 필동 임면수 선생/수원특례시 제공  © 모닝투데이


세류동 공동묘지에 안장됐던 임면수의 유골은 1964년 삼일상고 동산으로 옮겨졌고, 그를 기리는 ‘필동 임면수 선생 묘비’도 세웠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현충원에 안장됐다. 묘비는 2015년 수원박물관 야외전시 공간으로 옮겨졌다.

 

임면수 선생의 손자 임병무(69)씨는 부유했지만 교육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치고독립운동에 헌신한 할아버지를 존경한다며 할아버지뿐 아니라 오로지 나라의 독립만을 생각하며 행동한 독립운동가들을 국민들이 기억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과 가까운 팔달로1가에 살고 있는 임병무씨는 종종 올림픽공원을 찾아 할아버지를 만난다얼굴이 무척이나 닮았다시인인 그는 최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시를 담은 시집 세상살이 한 마디를 펴냈다.

 

2015년 2월 학계와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독립운동가 임면수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했고시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광복 70주년이었던 2015년 8월 15일 올림픽공원에 임면수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105주년 삼일절을 앞두고 임면수 선생 동상을 참배한 이재준 수원시장은 후손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의 철학과 정신을 알리기 위해 힘쓰겠다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그분들이 바라던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 수 있도록 시민들과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