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아침] 화장을 고치며

김춘성 시인 | 기사입력 2020/06/04 [09:29]

[시(詩)가 있는 아침] 화장을 고치며

김춘성 시인 | 입력 : 2020/06/04 [09:29]

▲ 김춘성 시인     ©모닝투데이

/화장을 고치며          김춘성

 

오지 않을지도 모를 고장난 막차를 무작정 기다리기란 좀 그렇긴 해/ 지금, 아무래도 그냥 천천히 걸어야할까봐/ 막차를 타고 내린다 해도 어차피 거기서도 시오리는 걸어야 할 밤길/ 어둠이 두렵지 않으니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지/ 달이라도 뜨면 좋고, 희미해도 눈에 밟히는 그대로 천천히 걸으면 돼/ 혼자면 어때, 잘그락거리는 자갈들의 울먹임도 들으며/ 잘나지 못해 눌려있던 개구리소리도 들으며/ 별똥별 달려 내리는 곳을 바라보며 한 번 형광螢光을 입어보는 것이지/ 밤길이야 혼자가 제 길이어서/ 옥양목 길게 늘여진 춤사위 따라 더운 애간장을 식히며/ 어딘가에 숨어있던 향기들을 하나씩 품어 안으며/ 쑥스러움에 화들짝대는 텃새들이나 다람쥐 같은/ 낮은 계급의 짐승들, 어머니의 한숨을 곱새겨보는 것이야/ 귓가로 흐르는 외딴 마을의 외로운 등잔불소리/ 허공으로 흩어지는 시골 개들의 의미 없는 고독한 의무/ 그런 것도 찬찬히 생각해보며 아주 천천히 걸어보는 것이야/ 아무래도 어떤 아침이래도 아침이야 오지 않겠어?/ 왜 사느냐고 묻기도 하고, 어떻게 살았냐고 묻기도 하고/ 행복 때문이라고 대답도 하며/ 아버지의 검은 버찌들 하나씩 주워 챙기며/ 흐느끼는 숲의 어깨야 어쩔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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